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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l 묘지의 형태 l 묘의 유형과 변천 l 앞으로의 전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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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사체를 매장한 시설물로 무덤, 뫼, 묘(墓), 영(塋), 총(塚), 분(墳)으로
부르며, 임금이나 황제의 묘는 능(陵)이라 부른다.
묘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사체 처리물이라는 설과 죽은 사람의 기념적 형상물이라는 설이다. 사체 처리물의 근거는 사람이 죽으면 곧 부패하여 악취가 풍기고 보기에도 흉하므로 어떤 방법으로든 사체를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처리 방법으로 묘가 생겼다는 것이다. 사체의 처리 방법도 생활환경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사체를 바위나 나무 위에
얹어놓아 새나 짐승들에게 그 처리를 맡기는 풍장(風葬), 강변이나 해변에서 사체를
물 속에 가라앉혀 물고기에게 그 처리를 맡기는 수장(水葬), 열대지방에서 급속한 사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화장(火葬)을 하는 것 등이 있다. 이와 함께 묘지도 그러한 사체
처리 방법으로 땅을 파고 묻은 매장의 결과로 생긴 형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기념적
형상물의 근거는 공동생활의 일원이 죽으면 슬픈 감정이 우러나고 그리운 정이 생기므로
죽은 사람 대신 그를 추모할 기념적 형태로서 묘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또 묘지의
범위도 한 묘에 한 구의 사체를 묻는 단장(單葬), 부부 또는 가족을 함께 묻는 합장(合葬),
일족을 차례로 묻는 추장(追葬), 부족 전체를 한 곳에 묻는 군장(群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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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봉분(封墳)의 모양에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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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봉분(封墳)의 재료에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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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적석총(積石塚) - 돌을 쌓아 올려 봉분을 만든 묘지. | |
4) 석총(石塚) - 돌로 된 묘지. | |
5) 토총(土塚) - 흙으로 된 묘지. | |
6) 전축분(塼築墳) - 벽돌을 쌓아 봉분을 만든 묘지 | |
3. 유구(遺構 - 관)의 재료에 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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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곽묘(石槨墓) - 시신 주위가 작은 석실로 된 묘지. | |
4) 목관묘(木棺墓) - 관을 나무로 만든 묘지. | |
5) 목곽묘(木槨墓) - 시신 주위를 나무로 궤 모양으로 만든 묘지. | |
6) 도관묘(陶棺墓) - 관을 도자기로 만든 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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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시대 |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구석기시대의 무덤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신석기시대에는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집
근처의 땅속 혹은 조개더미 밑에 묻었으며,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부터 무덤의 형태도 다양하며
무덤 조성에 들인 정성도 깊어 당시의 문화와 역사를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시대의 무덤은 전통적인 토장묘, 지석묘, 석관묘, 석곽묘, 적석총 등이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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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시대부터 삼한시대까지 이 시기에는 토장묘, 토광묘, 지석묘, 석곽묘 등이 있었다. |
가장 전통적이며 기초적인 무덤의 형태지만 유적으로만 보았을 때 주거유적과 혼동이 되기도 한다. |
토광묘는
청동기 중엽에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그 구조는 땅을 약 1m정도 파고 목관이나
목곽을 만든 형태이다. 토광묘의 분포는 대동강 유역에 가장 많이 밀집되어 있고, 최근에는
낙동강 하류유역에도 최근 발견되며, 그밖에 영산강과 한강유역에도 가끔 발견된다 토광묘(土壙墓)는 그 형식을 세분하면 순수토광묘(純粹土壙墓), 목곽토광묘(木槨土壙墓), 석개토광묘(石蓋土壙墓) 등으로 구분된다. 토광묘의 부장 유물로는 세형동검(細形銅劍), 철제대도(鐵製大刀), 동경(銅鏡), 철제거여구(鐵製車輿具), 칠기(漆器) 등과 간혹 명문(銘文)있는 칠기, 인장(印章) 등이 발견되기도 한다. 토광묘는 그 규모나 부장물로 보아 당시 지배층의 무덤으로 원래 봉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평지화 했을 것이다. |
지석묘우리나라의
가장 독특하고 전통적인 무덤형식이다. 그 구조는 지상에 커다란 돌을 괴어 올려놓은 것인데 봉분을 만들지 않으므로 우리의 무덤에 대한 고정관념과 거리가 있다. 지역적 분포는 함경북도 일부와 울릉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과 연근해의 섬 지역에도 고루 퍼져있다. 지석묘의 형태는 탁자형(卓子形), 기반형(碁盤形), 변형(變形)의 세 가지가 있다. 지석묘가 있는 지형은 대개 하천이나 해변의 평지 또는 약간 높은 대지에 무리를 이루는데, 수십, 수백개가 일직선 혹은 원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지석묘의 부장 유물로는 무문토기(無文土器) 조각, 화살촉, 돌칼, 돌도끼, 가락바퀴 등 마제석기와 드물게 곡옥(曲玉), 관옥(冠玉), 청동기 등이 나오기도 한다. |
석곽묘는
토광묘처럼 지표에 봉분이 없어진 평지 그대로의 형태이다.
그 구조는 지하 1m정도를 파고 구들장 같은 돌을 여러 장 세워 석관 모양을 한
것이다. 석관묘는 시베리아 지방에서 만주를 거쳐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압록강과 두만강유역부터 제주도까지 고루 분포되어 있다. 석관묘가 있는 지형은 지석묘와 같으며, 부장품도 지석묘와 비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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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시대 |
고구려의
초기 고유 묘제(墓制)는 널방(石室)이 지상에 만들어지는 적석총이었으나 뒤에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봉토석실분(封土石室墳)을 주로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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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적석총과 달리 적석봉토분(積石封土墳)이었다. 목관을 넣은 목곽 주위에 돌을 채우고 다시 진흙으로 덮은 다음 흙과 자갈을 교대로 쌓아 커다란 봉분을 만든 형태인데 금관총(金冠塚), 금령총(金鈴塚), 천마총(天馬?) 등이 이에 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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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의 낙동강유역과 남해안 지역은 토광묘, 장방형석실분, 석관묘, 옹관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특징은 장방형석실분이다. 이런 무덤들은 대부분 원형봉토분이고 전방후원분도 약간 끼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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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여러 묘들은 주로 왕릉이나 지배계층의 묘의 경우이고, 일반 서민들은 봉분조차 없는 토묘(土墓)에 묻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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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통일 신라 시대 |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묘에 여러 가지 장식을 갖춘 것이 특징인데, 무열왕릉처럼 비각을 세우기도 하고, 석인(石人),
석수(石獸) 등으로 신도(神道)를 장식하고 무덤 주위에 호석(護石 - 둘레석)과 석란(石欄
- 돌로 만든 난간)을 두르고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배치하는 등 무덤을 호화롭게 꾸몄다.
한편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법이 생기면서 장사를 후히 지내는 풍습도 쇠퇴하였다. 왕릉 이외에는 봉분도 없는 것이 많이 생기고 골호(骨壺 - 뼈 항아리)가 많이 발견된 것도 그 당시의 풍습을 짐작케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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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시대 |
신라의 묘제를 대체로 계승하였다.
이 시대의 특징은 풍수지리를 중히 여겼다. 또 부장품이 박해져 금은옥석의 장신구 대신
동경과 자기(瓷器)가 들어있는데 이는 불교의 생활화와 북방 문화의 영향으로 생각된다.
묘지의 형식은 신라에 비해 석란이 높고 능묘 앞에 문무의 석상 또는 망석(望石), 석등(石燈), 정자각(亭子閣)을 두고, 묘지(墓誌)를 새겨 넣기 시작했다. 일반인의 묘는 대부분 목관을 토장하고 봉분을 조그맣게 만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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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선시대 |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풍수지리를 중히 여긴 점도 같다. 고려 때와 다른 점은 묘의 형식에서 석실이 없어지고 석곽이나 석관으로 바뀌었다. 묘의 외형도 초기의 장방형에서 중기 이후에는 원형으로 정형화되었다. 또 유교적인 사상으로 승려를 제외한 모두가 토광묘가 일반화되었다. 능의 경우 입구 홍살문을 지나 석교(石橋), 정자각이 있고 정자각 앞에는 수복방(守僕房 - 능의 관리를 맡던 기관)과 수라방(水刺房 - 임금의 식사를 담당하던 기관)이 있으며 분룡(墳龍 - 능의 봉분)은 정자각 뒤의 높은 곳에 위치하는데 호석, 석란, 문무의 석상, 석마가 있다. 또 능묘 뒤의 3면에 담장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사대부의 무덤에도 망주 석등을 세우고 석인을 배치한 곳도 있다. 또 묘 앞에 상석, 묘표를 두고 신도에 묘비와 묘갈을 세우는 것이 유행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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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현대 |
조선시대의 유교적 매장법을
계승하여 원형토광묘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일제 때는 정책에 따라 공동묘지와 화장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산간 오지나 일부 섬 지방에서 매우 드물게 초분이라하여 사체를 짚으로 이엉을 엮어 덮어두었다가 육탈이 된 후에 다시 매장하는 풍습도 있었다. 광복 후 6.25를 겪고 기독교가 성행하면서 무덤 형식도 변화가 생겼다. 장방형의 낮은 봉분, 봉분 둘레에 장대형의 호석을 두르는 등 원형분 일변도에서 모양이 다양해졌다. 그러나 무덤의 내부는 여전히 토광의 전통법이 고수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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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묘는 원시적 가족공동체에
뿌리를 두고 외래의 제도, 풍습, 사상에 융합되면서 여러 형태로 변천해왔다. 선사시대의
지석묘, 삼국시대 중기까지의 순장 풍습,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온 풍수지리 사상 등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류를 이루는 것은 효가 바탕이 되어 조상의 무덤을 중히 여기고 매장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이런 매장 중시 풍습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그 폐단도 지적되고 있다. 근래에 국토의 이용과 개발이라는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묘지 문제가 정책상의 과제가 되어 개별분묘의 단위 면적을 극도로 제한하고, 개인 분묘의 경우 최장 60년까지만 매장이 가능하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장묘 문화는 가족묘지 더 나아가 화장하여 납골하는 공동 납골묘가 대체적인 추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우려하고 조심하여야 할 점은 여러 주위 환경으로 수천년 이어온 효를 바탕으로 한 조상숭배의 사상과 가족 나아가 씨족이란 공동체 의식의 해체이다. 이 법이 시행되어 법으로 강제하기 이전에 우선 개개인의 의식이 바뀌어야하고, 특히 사회 지도층이 먼저 솔선 수범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요즈음도 일부 부유층에서 호화분묘를 조성하여 물의를 일으킨 사례가 많은데, 법을 만든 지도층에서는 지키지 않고 일반 국민만 따르라고 할 때 누가 그 법을 지키겠는가? 조상의 묘를 호화롭게 한다고 복을 받고 지체가 높아 보인다는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한다. 조상에 대한 가장 큰 것은 관심과 정성보다 더 큰 것이 없음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것이 어리석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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