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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관리하는 묘지 l 외국의 묘지 풍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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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현충원 |
서울 동작동에 위치한 이곳은 일제에 빼앗긴
국권 회복과 1950년 공산군의 침략으로 나라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16만 3천여 호국 영령이 잠들어 있는 민족의 성역이다. 이곳은 관악산 기슭의 공작봉(孔雀峰)을 주봉으로 하여 정기 어린 동작의 능선이 3면을 감싸고 앞에는 한강이 굽이쳐 흐르는 43만여 평의 땅 위에 있다. 원래는 1955년 7월 15일 국군 묘지로 창설되어 군인과 군무원만 안장하였으나, 1965년 3월 30일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순국선열, 애국지사를 비롯하여 국가유공자, 경찰, 예비군 등 범위가 넓어졌고 1996년 6월 1일 “국립묘지관리소”에서 “국립현충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 여기는 민족의 얼이 서린 곳, 해와 달이 이 언덕을 영원히 지켜 주리라!'는 글귀가 가슴을 여미게 하는데 정문에 들어서면 돌진하는 용사의 상이 참배객을 압도한다. 마주 보이는 곳에는 현충문(顯忠門)과 현충탑(顯忠塔)이 우뚝 서 있고, 현충탑 안에는 한국전쟁 당시 호국용사들 가운데 시신을 찾지 못한 10만2,000여 위(位)를 위패(位稗)로 봉안(奉安)하고 있다. 동작(銅雀)이라는 말은 노고지리 또는 즉 종달새를 뜻함인데, 동작동 국립묘지를 풍수지리(風水地理)상으로 금계포란(金鷄抱卵 -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형국이다. 금닭은 곧 봉황이다. 주작(朱雀)을 뜻한다. 구리(銅)빛 얼굴의 산화(散華)한 영령(英靈)들이 주작의 ‘작(雀)’ 품속에 잠든 것도 동작(銅雀)이라는 땅이름과 그리 무관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위 두 가지 설의 선후가 있을 것인데 동물적인 생활을 하던 시대에는 사체 처리의 방법으로서 무덤을 만들다가 차츰 인간적 감성을 가지면서 무덤이 기념적 의미를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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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전 국립묘지 |
서울 동작동에 설립한 국립묘지는 6.25전쟁과 월남전
등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전사 또는 순직한 분을 안장하여 왔으나 70년대에 접어들면서
멀지 않은 장래에 안장능력이 한계에 이를 것이 예측되었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1974년 말 지방 국립묘지의 설치를 검토하도록 하였다. 1976년 4.14. 충남 대덕군 유성읍 갑동리(현재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으로 행정구역 변경)로 위치를 확정짓고 설계 측량 건설공사의 과정을 거쳐 1985년 11월에 준공을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대전 국립묘지의 위치는 권역상 충청권, 국토개발 지역권으로 보면 대전권에 속하며, 행정 구역상으로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으로서 유성에서 32번 국도를 따라 공주 방향으로 약 4㎞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부여~공주 관광권으로 진입하는 관문적 성격을 띠고 있으며, 주변에는 유성온천과 계룡산 국립공원, 국립중앙과학관, 대덕연구단지, EXPO과학공원 및 충남대학교 등이 위치하고 있다. 대전 국립묘지의 지형지세를 보면 주산을 문필봉과 옥녀봉으로 명산인 계룡산을 태조산으로 하고 있다. 계룡산은 택리지에 의하면 삼각산, 오대산, 구월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4대의 역량있는 큰 터라고 한다. 이처럼 대전 국립묘지의 지형은 명산인 계룡산의 맥을 이어 받은 문필봉을 조종산으로 하고 이 지역내의 주산인 옥녀봉을 정점으로 좌우 능선이 좌청룡 우백호이며, 중앙에 혈이 있어 그 앞이 명당이고, 내수구로부터 외수구로 소하천이 합수되어서 서출동류하며, 좌향은 동남향으로 가장 이상적인 명당 자리라 하겠다. 대전 국립묘지의 전체 면적은 3,260,000㎡(986,150평)로 이 중 묘역 면적이 660,000㎡이며, 안장능력은 서울묘지의 약 2.5배인 131,100기로서 100년 앞을 내다보고 건설하였다. |
3. 국립4.19묘지 |
삼각산 기슭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자리잡은 4.19묘지는 1960년 4.19혁명 때 희생된 224분의 합동 분묘로
이들을 기리는 기념탑이 세워져있고, 탑 중앙에는 의롭게 죽은 이들을 기리는 탑문이 새겨져
있다. 41,110 평의 묘지 경내에는 소나무와 향나무, 주목과 단풍나무 등으로 아담하게 꾸며져 있으며, 500평 규모의 기념관과 영정을 모신 유영봉안소는 한식 목조건물이 100평 규모로 확장되어 있다. 그 외에 상징문, 민주의 뿌리, 정의의 불꽃 등 조각작품과 연못이 있으며, 보도 블럭을 예쁘게 깔아 놓은 산책로와 야외의자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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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
우리나라 장묘(葬墓) 제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국의 묘는 전국시대 까지 묘 위에 묘당이란 건축물을 세우기는 했어도
봉분을 쌓아올린 예는 확인되지 않았다. 은나라 주나라 때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묘지가 구분되는데 수혈묘광(竪穴墓壙), 목곽(木槨), 목관의 크기, 순장묘(殉葬墓)나 거마갱(車馬坑) 또는 부장품의 수에 의해 신분사회의 격식이 명확히 규제됨을 볼 수 있다. 봉분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시점은 전국시대인데 봉분을 만든 유래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 아닌가 추측한다. 봉분이 있는 묘의 집대성판은 진시황 능으로 한 개인을 위해 방대형상(동서 345m, 남북 350m, 높이 76m)의 봉분을 쌓고 그 주변에 광대한 능원(陵園)을 조성하였으며, 그 성벽 밖 여러 곳에 순장묘와 병마용갱을 배치하였다. 전한(前漢)의 제릉(帝陵)은 진나라의 제도를 더욱 발전시킨 것으로 황제와 황후의 묘를 중심으로 무수한 권속이나 공신의 배장묘(陪葬墓)를 배치하고, 능묘를 관리하는 능읍(陵邑)을 설치하였다. 이런 능원제는 그 후의 왕조에도 이어졌으나 국력의 우열이 묘의 규모에도 민감하게 나타났으며, 제릉에 비견되는 능은 당나라 때뿐이었다. 또한 인공적인 봉분을 쌓는 방법 외에 자연의 산을 능원으로 만들기도 하였는데 한나라 때에 만든 하북성 만성(滿城)의 중산왕묘가 그것이다. 산허리에 터널을 뚫어 묘실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도 후에 당나라의 소릉, 건릉은 그 규모가 더욱 확대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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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시아 |
일본 북해도의 아이누 족은
토장을 하는데 묘의 구덩이를 팔 때 인체를 넣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판다. 그것은
구덩이를 넓게 파면 그 빈 공간만큼 또다시 사람이 죽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통은 관을 만들지 않고 시신을 거적으로 싸서 묻지만 사할린의 아이누 족은 지붕 모양의 관을 사용한다. 묘표(墓標)는 남녀의 성별과 지방에 따라 형식을 달리하는데, 시체의 머리부분에 세운다. |
중앙아시아 |
중앙아시아의 카자흐 족은
측면에 감실(龕室)을 가진 묘혈(墓穴)에 토장을 한다. 시체가 흙에 닿지 않도록 헝겊으로 싸서 감실 안에 안치한다. 묘의 위는 돌을 쌓는데 이는 들짐승으로부터 시체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옛날에는 아시아 내륙의 다른 유목민들과 마찬가지로 죽은 이의 말도 함께 묻었다. |
동남아시아 |
남 베트남의 산악지대에 사는
화전민인 라데 족은 무덤을 분구형(墳丘形)으로 만들고 무덤 옆에 조그만 집을 세운다.
매장 후 3일째 되는 날 무덤 근처에서 물소를 잡아 연회를 베푼다. 또 무덤에는 죽통(竹筒)이 연결되어 유족들이 죽은 이에게 오랫동안 음식을 공급해 준다. 그 기간 중 무덤에서 계속 불을 피우는데 이와 같은 의식이 1년 혹은 수년 동안 계속되고 탈상 때가 되면 그 사실을 죽은 이에게 고하고 마을사람들을 초대하는데 2일 뒤에 준비가 끝날 때까지 유족들은 무덤 옆에서 잔다. 무덤 주위에는 네 귀에 기둥을 세운 울타리를 두르고, 기둥 윗부분에 인간과 동물의
상을 조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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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
유럽에서는 르네상스와
함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습속이 생겨, 14, 5세기에 걸쳐 특별한 조묘(造墓)
미술이 번성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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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카 |
미국의 애리조나주의
호피 족은 시신의 머리에 가면을 씌우고 성장하여 새털로 장식하고, 거적, 모포로 싸서
절벽 아래쪽의 묘지에 둥글게 구덩이를 파고 묻는데, 앉은 자세로 얼굴이 동쪽으로 향하게
한다. 무덤 위에는 돌을 잔뜩 쌓아놓는다. 물을 넣은 호리병박과 음식물을 쌓은 접시를 무덤 옆에 놓아두는데, 고인이 제물을 먹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교결사(宗敎結社)에 가입하지 않은 어린이의 시신은 절벽 끝의 바위틈에 안치할 뿐이며, 집에 돌아오는 길가에 음식물을 뿌려 어린이의 혼백이 집에 돌아와 새로운 아기로 태어나도록 한다. |
아프리카 |
우간다의 농경민인 간다 족은
묘 구덩이를 파서 나무껍데기를 깐 침상에 시신을 안치하며, 때로 무덤 위에 지붕을 이은
봉분을 만들고 조그만 사당을 그 꼭대기에 세운다. 이 사당은 술, 가축 등 제물을 바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영혼은 육체를 떠나 우선 사신에게 심판을 받은 다음 다시 돌아와 사당에서 산다고 믿는다. 또 죽은 지 2년이 지나면 영혼은 다시 아기로 재생한다고 믿어 그 아기에게는 죽은 이의 이름이 붙여진다. 그와 동시에 죽은 이의 제사는 폐지되고 무덤도 돌보지 않아 황폐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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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초문의 및 견적 요청 | 2021-04-01 |
사초의뢰. 전남 담양군 담양읍.. | 2021-03-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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